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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현황

시민이 함께하는 자립도시 군산. 시민이 만드는 자치도시, 모두가 잘사는 경제도시, 문화가 흐르는 관광도시, 골고루 누리는 행복도시, 더불어 쾌적한 안전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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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

  • 1985. 10 : 옥구군 옥구읍 서부출장소
  • 1989. 4 : 옥구군 옥서면 승격
  • 1995. 1. 1 : 군산시와 옥구군의 통합으로 군산시 옥서면으로 개칭

유래

옥봉-리(玉峯里)[리] 본래 옥구군 정(지산)면의 지역인데 1910년 군산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성산리, 남동리, 수라리를 병합하여 옥녀봉의 이름을 따서 옥봉리라 하여 옥구군 구읍(옥구)면에편입되었다가 89년 4월 1日字로 옥서면에 편입되었습니다.

옥봉리 수라(繡羅) 옥봉리 수라(繡羅) 마을은 조사에 의하면 고려시대 형성된 마을로 나타난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옥녀탄금(玉女彈琴)또는 옥녀직금(玉女織錦)의 형국으로 옥녀봉아래에 있는 아름다운 마을이다. 군산지역의 하늘의 관문인 군산공항(비행장)이 있으며 비행장 이전에 이곳 지형은 '평사낙안'이라 하여 기러기가 모래밭에 내려 앉는 형국이었는데 오늘날에는 기러기가 아닌 비행기가 기러기 처럼 내려 앉고 뜨고 있다. 이 넓은백사장 언덕에는(예전) 소나무숲이 있고 명사십리 해당화가 볼만 하였다고 한다. 1960년 이래 백합양식업이 성행하였고 근래에는 해태양식업과 겸업하고 있으며 어패류가 난다. 인근에 비행장이 있어 주민이 많이 늘었다. 34세대에 96명이 밭 18헥타 논 220헥타 기타 6.7헥타에 농업위주의 농촌마을이면서 비행장 출입하는 인구도 있다.

옥봉리 남수라(南繡羅) 옥봉리 남수라는 원래가 수라마을에 속했는데 인구가 늘어나면서 분리되어수라마을 남쪽에 있다고 하여 남수라라 부르게 되었다. 수라마을과 같이 옥녀봉 아래에 있으며 비행장을 인접해 이웃마을 송촌, 산동과 함께 크게 발전된 새마을이다. 세대수 101호에 323명이 밭 19헥타, 논 32헥타로 농업과어업과(호미로 조개를캐는 작업) 비행장을 일터로 생활한다. 24동의 농촌 시범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고 군산공항에서는 민항기가 서울, 제주도를 내왕 한다. 성씨는 각성받이가 모여산다.

옥봉리 남동(南洞) 옥봉리 남동 마을은 옥녀봉에서 이어진 구릉과 성산에서 북으로 이어진 마을이다. 이웃 마을로는 계산 마을과 신동마을, 성남동이 있고 옛 북대지 들에서 볼때 나쪽에 있기 때문에 남동이라고 불렀다 한다. 한편 문창 고을이 남쪽에 있다고 하여 남동이라고 하며 해발 100미터의 돌박제산이 있다. 마을에는 1967년에 세워진 가나안 교회가 있고 150여년 된 큰 은행나무가 있으며 안뜸 우물(바위샘이라고도 함)에서는 주민이 식수로 사용하는데 물맛이 좋기로 소문이나 있으며 한여름에는 시원한 냉수가 자랑거리다. 주민 66세대에 201명이 밭 10헥타로 논밭이 알맞게 있어 농사에 전념하면서 평화스럽게 살고 있다.

옥봉리 계산(鷄山) 옥봉리 계산 마을은 닭계자를 쓰는데 닭메라고도 부른다. 산의 형세가 닭의 모양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며 계산지(鷄山地)가 있으며 방향은 내초도로 가는 길목이다. 이웃마을로는 남동이 있고 주민은 58세대에 136명이 밭 9.5헥타 논 31.5헥타에 농업에 의존해 살며 각성받이가 모여 산다.

옥봉리 신동(新洞) 1970년대 내성산 후록(기슭)에 생긴 마을로 옛지명은 새멀이라고 불렀다. 남동과 성남동 마을과 이웃하고 있으며 1945년 광복후 새터를 닦아 각처에서 이주해 온 주민이 살고 있다. 주민은 50세대 134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밭 5헥타 논 10헥타의 면적에 농업위주의 생활을 하고 있다.

옥봉리 성남동(城南洞) 옥봉리 성남동 마을은 시원하게 뚫린 공항로 우측에 있는 마을로 성산 중간에 있다. 성남동이라 이름하기는 성산마을의 성자와 남동마을의 남자를 취하여 성남동이 되었다. 벼농사 위주의 전형적인 마을로 넓은 들이 있다. 주민은 103세대 308명이 논밭 30헥타에 의존해 살고 있다.

옥봉리 내성산(內城山) 옥봉리 내성산은 옛지명[안성메]에서 유래된 말로 한자화한 말이다. 내성산 마을 뒤에 있는 성산에는 토성이라는 산성이 있었던 곳으로 지금도흔적이 남아 있다. 토성의 높이도 3미터이고 산의 높이는 해발 50미터 정도이다. 토성은 바다로 침입하는 외적을 물리치기 위해 쌓은 성이며 테 머리식으로 둘러 있다고 해 토성이라 한다. 이 마을에는 옥봉초등학교가 있으며 종교기관으로는 천주교회가 있다. 주민은 97세대 263명이 농사에 종사하고 있다.

옥봉리 원성산(元城山) 옥봉리 원성산은 성산의 남쪽아래에 있는 마을로 내성산에서의 방향은 동쪽이다. 앞에는 비옥한 평야가 있으며 서남쪽으로는 비행장이 있고 옥구읍,군산시로 이어지는 교통이 편리한 곳이다. 지역 주민은 83세대에 239명이 주로 농사에 전념하고 있으며 상업지역으로 발전이 가능한 지역이다.

옥봉리 삼거리(三巨里) 삼거리 마을은 원성산에서 갈라져 나온 마을로 원성산 앞은 큰 도로가 나있어 군산 공항을 오가는 길인데 하제방면과 옥구읍으로 오가는 세갈래 길에서 지명이 생겼다. 주민은 상업과 농사에 종사하며 113세대 348명이 논 20헥타 경작한다. 옥서면 소재지 마을로 옥서면 사무소가 있으며 1977년에 세운 성화 교회가 있다. 뒷산은 옛날 성터가 있었기에 성산이라고 부르며 해방되기 전후하여 천막치고 시작된 마을이 크게 발전하였다.소재지여서 상가가 형성되어있다.

옥봉리 외성산(外城山) 옥봉리 외성산은 성산의 남쪽에 자리한 글자 그대로 바깥 마을에 해당된다. 일제시대 금강과 만경강 유역을 간척할 때 큰 저수지가 필요함을 느껴 완주군 고산면과 동산면 지역의 대아리 저수지 최말단에 옥구 저수지를 만들게 되었다. 이 저수지는 옥구평야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며 음용수로도 활동된다. 한편 옥구읍쪽 지역에서는 마산제라 하며 또는 마산방죽이라 부르기도 한다. 성남동은 이 저수지의 서쪽제방과 접한 마을이고 마을 앞으로는 군산과 하제 방향의 도로가 있고 옥서파출소가 있다. 성산은 옛날 성터가 있었던 곳이나 아주 오래 전에는 섬이었고 오늘날의 벼농사를 짓고있는 평야는 바다였다. 지금도 논바닥 깊은곳에는 조개껍질이 나온다고 한다. 조선시대 형성된 마을로 내성산과 외성산이 있다하여 동쪽은 외성산 남족은 내성산이다 부른다. 옥구 저수지 크기는 365헥타로 한 마을의경작지를 따지면 10개부락또는 20개부락의 경지면적에 해당되니 크기를 짐작하리라 생각된다. 들가운데 생긴 저수지로는 큰편에 속하며 이 지역을 밧섬메라고도 했다. 마을에는 한상천씨 할아버지 공적비가 있으며 1942년에 세운 옥봉교회가 있다. 133세대 360명이 거주하고 있다.

옥봉리 신성산(新城山) 옥봉리 신성산 마을은 일제시대 남산에서 어은리까지 만경강 제방뚝을 쌓고 넓은 들은 개간하여 경지정리 할 때 옥구 저수지 아래 남쪽의 원성산 앞쪽이며 삼거리 마을의 동쪽 개간촌을 신성산이라 하였다.새터로 이주민이 모여 마을을 이루기는 7,80여년 전이다. 농가 41세대에 97명이 벼농사에 의존하고 있다.

옥봉리 구호촌(九號村) 옥봉리 9호촌 마을은 일제시 경지정리 할때 지역을 구분하기 위해 1호부터 10호 이렇게 불렀는데 구호 지역이여서 유래되었다고 본다. 70여년 전인 1920년대 간척지를 만들고 이주민을 모집해 정착시킨 마을이다. 신성산 마을의 남쪽에 있고 하제가가는 도로 옆에 있는 마을로 옥서 간척지 들에서는 규모가 크게 가꾸어지고 경지와 도로가 잘 정리되어 있다. 농협창고가 있으며 주민은 각성받이로 91세대 243명이 논 89헥타에 의존해서 산다. 종교단체로는 성남교회가 있다.

옥봉리 오산촌(五山村) 옥봉리 오산촌 마을은 회현면에도 이와 똑같은 간사지 지역에 오산촌이 있다. 옥구 평야를 간척지를 옥토로 개답할때 새마을이 생긴다하여 신기촌이라고도 하였다. 농토가 넓고 구획정리가 잘된데다 수리시설도 잘되어 이주민이 많이 모여든 곳이다. 1930년대 익산군 오산면 사람들이 먼저 정착했다고 해서 오산촌이라 했다고 전한다. 농가 65세대에 178명이 논 54.6헥타에 생활 근거지를 두고 살아가는 마을이다.

옥봉리 신오산촌(新五山村) 옥봉리 신오산촌 마을은 오산촌 서편에 있는 마을인바 구호촌에서 보면 남쪽방향이다. 이 마을은 옥서평야의 잘 정리된 오산촌과 같은 이름에서 유래된 마을이며 1940년대 형성 되었다고 한다. 처음 마을 형성시는 오산에서 이주해온 이씨성을 가진 사람이 정착해서 살았다고 한다. 58세대 179명이 32헥타의 벼농사위주의 영농마을이다. 이 마을과 함께 유래되는 이야기로는 고운 최지원(신라말의 학자 서기 857년생~?)선생이 중국을 다녀와서 책을 읽고 낚시를 즐겼다고 전해오고 있으며 지금은 상전벽해로 지형이 크게 변한 곳이다.

선연-리(仙緣里)[리] 본래 옥구군 정(지산)면의 지역인데, 1910년 군산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송촌, 상제리, 중제리, 하제리, 수라리 일부를 병합하여 신라 때 최고운이 이곳에서 머물다간 인연이 있다하여 선연리라 해서 옥구군 구읍(옥구)면에 편입됨. 1989년 옥서면으로 편입되었다.

선연리 송촌(松村) 선연리 송촌 마을은 군산비행장 출입문에서 가까운곳에 있는 마을로 지금은 없어졌지만 옛날 비행장이 건설되기 전에는 이곳에서 솔밭이 하제까지 이어져 있었고 해당화철에는 꽃 또한 절경을 이루어 명사십리였다고 하나 옛이야기가 되었다. 그래 흡사 선인이 살기에 알맞고 선인이 오는 선경으로 선연리라 했지 않했나 싶다. 마을의 형성은 200여년전 청주 한씨가 정착한 이래 오늘에 이르며 동네 중앙에 물이 흘러서 샛뜸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솔밭뜸(떰)이라고도 부르는데 지금도 동네안에는 소나무가 있다. 뒤에는 서해바다이고 앞에는 채석장이 있다. 이곳과 관련된 이야기는 고은 최치원선생이(신라시대) 내초도에서 출생하여 이지방에서 성장하면서 하제 마을자천대에 와서 공부하였는데 훗날 선인이 되어 자취가 없어지므로 그 이야기와 관련지어졌다고 하기도 한다. 그래서 선연리라고.........
세대수 139호 420명이 밭 13헥타 논 27헥타를 경작하며 마을에는 효자로써 정씨손의 정려비가 있다.(효열비) 정려비란 충신,효자 열녀를 그 고을에 정문에 세워 후세인에게 기리던 일.

선연리 산동(山東) 선연리가 생긴지는 1875년경 생긴 마을로 원래 송촌(솔메뜸) 이었는데 1981년 송촌마을에서 분활되었다. 산동마을은 군산공항 근처마을로 송촌과 남수라 마을 사이에 있다. 산동이란 바닷가에 산등성이 있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며 서해 바다와 맛붙어 어패류 (물고기와 조개류)가 많이 나며 밭이 많아 한때는 고구마가 많이 생산되기도 하였다. 114세대에 344여명이 살며 밭 7.8헥타, 논 20.1헥타를 경작하고 있다.

선연리 장전(長田) 선연리 장전마을은 1872년 동래 정씨가 처음 정착하여 살았다고 하며 예전 지명은 진밭 (길다란 뜻) 또는 긴밭이란 말로 한자어로 장전이 되었다. 송촌마을의 동남쪽에 있고 신동마을의 남서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동네에는 돌산이 있어 채석장도 있다. 주민은 110세대 316명이며 경작면적은 밭 10.1헥타 논 33.9헥타를 갖고 있다. 마을에는 1942년에 세운 선연교회가 있다.

선연리 장원(長源) 선연리 장원마을은 1960년 장전마을에서 분리된 마을로 장제에 근원이 있다고 해서 생긴 이름인듯 하다. 삼불산(三佛山)이 있고 공군기지가 있는 마을로 군산공항 입구에서 가까운 곳이다. 신장원에서 송촌가는 길 우측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에는 '3불제'라고 하는 접골 방죽(못)이 있다. 주민 101세대 300명이 밭 1.4헥타 논 1.6헥타로 작은 면적이다. 이 마을 전설로는 외성산과 내성산 중간에 성제산과 옥녀봉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선연리 신장원(新長源) 선연리 신장원은 장원마을과 같은 마을로 군산비행장 정문 옆 마을로 장원마을에서 새로 분리되어 생겼다. 비행장 출입하는 입구여서 약간의 점포가 형성되어 있으며 비행장안에 있는 아파트도 이 마을에 속한다. 131세대 388명이 살고 있다.

선연리 하제(下梯) 선연리하제마을은 만경강 하류로써 서해가 마주치는 바닷가 마을이다. 한편 선연리의 끝에 해당된다.하제 땅은 군산비행장을 인근에 두고있어 모퉁이 인데 신라의 대학자 고은최치원 선생이 젊은 시절 무릎을 꿇고 공부했다는 바위가 닳아 무릎자욱이 남아 있는 자천대 (紫泉垈)가 있었다. 그러나 이 자천대는 일제시 군산비행장을 만들면서 옥구읍 상평리 문창서원으로 그대로 옮겨졌다. 자천대는 자주색 돌로된 석룡(石龍)을 비롯하여 글읽기를 어찌나 열심히 하였던지 무릎 자욱이 났던 흔적이 있고 친히 먹었다던 우물이 있었다. 이 마을에는 300여년전 의령 여(宜)씨가 처음 정착한 후 오늘에 이르러 122세대 430여명 이 논 110헥타에 의지하며 어촌일로 생계를 삼는다.

선연리 중제(中梯) 선연리 중제 마을은 원하제에서 나눠 졌는바 난산(알산)의 사이에 있는 어촌 마을로 이고장의 특산물인 어패류 가공 공장이 있어 소득이 높은 마을이다. 주민은 124세대 412명이 대부분 어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하제 포구가 있다.

선연리 신하제(新下梯) 선연리 신하제 마을은 글자 그대로 하제 마을이 새로 생긴 마을인데 마을의 형성은 1940년으로 보고 있다. 선연초등학교가 옆에 있는 마을로 일제시대 비행장 건설로 이주하여 이룬 마을이다. 주민은 36세대 143명이 40.6헥타의 벼농사에 종사하고 있다.

선연리 난산(卵山) 선연리 난산 마을은 만경강 하류 작은 포구 입구에 있는 마을로 붉은 색의 알메산 (까치바위라고도 함)이 한자어로 쓸때 난산이다. 지역 주민은 외지인들이 많으며 그중 특히 전라남도 사람이 많이 와서 산다. 112세대 394여명이 어업에 종사하고 있다.

선연리 신난산(新卵山) 조선시대 형성된 마을로 난산에서 갈라져 생긴 마을이다. 주로 바닷가쪽에 있다. 역시 하제와 난산 마을과 같이 있으며 132세대 416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매년 3월에 수륙제를 지내며 마을에는 화산(붉은 흙으로 되었다고 함)에서는 이조시대 고군산 열도로 연락하는 봉화대가 있었다고 하며 지금도 흔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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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수정일 2019-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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