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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호장군 추모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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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호장군 추모제

  • 문의처 :

    063-454-3282

  • 장소 :

    전북 군산시 개정면 충의사 (최호 장군 사당)

  • 축제기간 :

    매년 음력 7월 16일

최호장군 추모제 안내

최호장군에 대하여...
  • 최호 장군은 1536년(중종 31년) 경주 최씨 최치원의 15대손 최한정의 사남 중 막내로 현 군산시 개정면 발산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무인으로 1552년(명종 7년)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북방을 지키는 중요 요직을 두루 거친 유명한 노장군이었다. 유소년기는 엄하신 할아버지 슬하에서 학문과 무예를 닦았었다. 그 후의 10년 간은 아버지 밑에서 아버지를 도우면서 무장(武將)의 길을 닦았다.
  •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8년 전 1574년(선조 7년) 39세에 무과병과에 급제(武科丙科 及第)하면서 중앙 무대로 진출하게 되었다. 2년 후 이순신 장군이 32세에 선조 9년(1576) 무과 급제할 때 현직 고급 무관을 승진시키기 위하여 10년마다 실시하는 무과중시(武科重試)에 최호 장군은 응시하여 『갑과 제일인급제(甲科 第一人及第)』하였다. 무인으로서 가장 명예로운 중시 갑과에 장원급제한 실력 있는 무장이었다. 최호 장군은 이순신 장군보다 9살 연상이며 무인의 대선배였다.
  •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 통제가 되기 전까지는 품계(品階)나 직품(職品)은 최호 장군이 앞섰었다.
    1592년(선조25년) 임진년 4월 14일 왜군 15만 대군이 부산에 상륙한지 16일만인 4월 30일 선조는 서울을 버리고 서천(西遷)의 길을 떠나야 했다. 5월 2일 서울이 점령당하고 6월 18일 평양이 함락 당하였다. 선조는 6월 30일 의주에 도착하였다. 서천의 길을 떠나는 선조의 행차는 실로 처량하고 황망하였지만 후위(後衛)를 지키는 오위도총부 도사(都事) 최호 장군의 수호가 있었기에 아무 탈 없이 의주에 도착할 수 있었고 또 의주를 방어할 수 있었다.
  • 수군은 1차 옥포에서, 2차 당항포에서, 3차 한산도에서, 4차 부산해전에서 적을 대파시킨 승전 장계가 연이어 올라와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한 이순신 장군에게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는 승전의 반가움이 있었지만 육지에서는 연일 패전의 위급한 급보뿐이었다. 왜군의 정예부대 고니시(小西行長)의 군이 평양성에까지 북상하여 이를 지키는 동안 가토오(加藤淸正) 군은 황해도 곡산을 거쳐 안변을 통해서 함경도 방면으로 침공하여 6월 24일 영흥에 이르고 7월 22일 두 왕자(임해군, 순화군)를 붙들었다.
  • 한편 명나라 지원군을 의지하였지만 지원군은 평양과 해정창에서 패하고 다시 8월 1일 평양전투에서 패하는 등 겉잡을 수 없는 위기 상황이었다. 이 어려운 시기에(9월) 최호 장군을 함경남도 병마절도사(咸鏡南道 兵馬節度使)로 제수하였다. 당시 정3품의 절충장군(折衝將軍)의 품계에 종2품(從二品)의 병마절도사는 무장으로는 최고의 직책이다.
    병사를 모집 증원해가며 훈련시켜 함경도 일대의 침략군 중 가장 강한 정예부대 가토오(加藤) 군의 서진(西進)을 막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최호 병사는 소수의 병력으로 유격전술을 구사하여 지리에 불리한 왜군을 괴롭히며 살육하였다. 가토오 군은 더 이상 진격할 수 없게 되어 최호 병사는 의주를 수호하는 어려운 일에도 큰 공을 세웠다.
    오만하던 왜군도 도처에서 일어나는 의병(義兵)과 명나라 지원군의 증가 그리고 보급의 차단에 지리적 불리함과 기후의 악조건 등으로 전세가 악화되어 가고 화의가 논의되면서 그들은 서울을 버리고 남쪽으로 물러나기 시작하였다.
  • 선조 26년 4월 18일 1년 만에 서울이 탈환되고 10월 18개월만에 선조는 서울로 환도하였다. 화의의 진행에 따라 싸움이 소강상태일 때 최호 병마절도사는 휴직을 청원하게 되었다. 전란 중에 아버지의 상을 당하였지만 전란중 병사(兵使)의 직을 떠나지 못하였는데 비로소 선조의 윤허(允許)를 받았다. 병마절도사 3년 만에 귀향하였다.
    고향에 돌아온 최호 장군은 정성껏 시묘(侍墓) 생활을 하였다. 최호 장군은 효자 중의 효자이었다.
  • 그러나,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기 10개월전 기복출사(起復出仕; 상복기를 마치기 전에 벼슬에 나오게 하는 것)를 명 받았는데 충청도 수군절도사로 명 받았다. 정3품의 절충 장군에 정3품직의 수사(水使)이다. 최호 장군은 충청도 수사 부임 3개월에 전란에 허덕이는 민심을 선동하여 이몽학(李夢鶴)이 충청도 부여군 홍산(鴻山)에서 난리를 일으켰다. 1596년(선조 29년) 7월 7일 도탄에 빠진 나라를 더욱 어지럽게 한 난리를 신속히 평정하는데 최호 수사는 큰공을 세웠다.
    당시의 재상 유성룡의 찬사의 유시(遺詩)나 1604년(선조 37년) 공신책록시 청난공신(淸難二等功臣)으로 추증(追贈)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1597년(선조 30년) 1월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이순신 통제사가 모함을 받아 2월 26일 삭탈관직을 당하고, 서울로 압송 당한 후 원균(元均)은 통제사 임명을 받았지만 연합 함대의 사기는 예전과 달랐다.
  • 원균 삼도 수군통제사는 7월 6일 적의 수군 6백여척의 내침에 독전(督戰)을 받아 부산 앞바다에 출격하였지만 작전 지휘의 혼란으로 서생포 가덕도에서 크게 손상을 입고 세(勢)가 불리(不利)하여 거제도 본 섬과 부속섬 칠전도 사이에 있는 칠천량(漆川梁)에 정박하게 되었다.
    7월 16일 새벽 사기충천한 적 수군의 총공격 기습을 받아 연합함대는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참패를 당하였다. 선봉장 충청수사 최호 장군은 용전분투 최후까지 싸웠지만 중과부적으로 집중포화의 공격을 받아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이 싸움에서 역전의 용장 최호 수사를 비롯하여 전라우수사 이억기, 조방장, 배홍립 등 다수의 장병들이 순국하였다.
    다만 경상우수사 배설만이 12척을 이끌고 한산도로 빠져나갔다.
  • 후일 선조는 최호 장군의 전사 소식을 듣고 낙루(落淚)하면서 예관(禮官)을 보내어 정중하게 치제(致祭) 하도록 제문(祭文)을 지어 보냈다. 임란이 끝난 6년 후 1604년(선조 37년) 공신책록에서 『이몽학의 난』평정의 공신으로 청난공신(淸難功臣) 이등공신(二等功臣)으로 책록되었고 정2품의 자헌대부(資憲大夫)에 병조판서(兵曹判書) 의금부사(義禁府事)로 추증(追贈)되고 계성군(鷄城君)으로 봉군(封君)되면서 충원공(忠元公)의 시호를 받았다.
  • 군산시 개정면 발산리에 있는 반월산(半月山) 선영의 동쪽사당은 최호장군 순국후 132년 청난공신 책록으로부터는 125년이 지난 1972년(英祖 5년)에 나라의 하사금으로 창건된 사당이다. 사당 왼편으로는 장군의 교지가 전시되어 있는 전시관이 있으며, 정면에는 신축한 사당, 오른쪽에는 묘소가 있다. 묘소 옆 산길을 따라 넘어 가면 지방기념물 32호인 최호장군 사당(忠義祠, 1906)이 있다.
  • 1990년부터 최호장군 추모제를 문화원 주관으로 매년 실시해오다가 1995년부터 최호장군추모제전위원회가 조직되어 추모제를 주관해 오면서 최호장군 유적지의 성역화가 논의되어 2000년 11월 최호장군유지 성역화사업 기본계획(군산시)에 따라 국비로 2001년부터 2002년 4월까지 정면 3칸 측면 3칸 바닥면적 66.24㎥(20.03평)의 忠元公의 충의를 숭모하는 忠義祠와 내삼문(측면 3칸, 바닥면적 16.56㎥(5.0평))을 새로이 현 위치에 신축, 2002년 4월 27일 현판식을 갖고 추모제를 지냈다.
행사연혁
  • 1990년(393주기)부터 문화원의 주관으로 최호장군의 충절을 기리는 최호장군 추모제를 순국의 날(음력 7월 16일)에 매년 성대히 집행하여 왔고, 1999년부터는 우리고장의 전통행사로 2004년(407주기) 5월 7일까지 충의사에서 추모행사를 매년 실시하여 왔다.
행사내용
  • ① 제례 ② 추모식
최호장군 추모제
  • 일시 : 매년 음력 7월 16일
  • 장소 : 군산시 개정면 충의사 (최호장군 사당)
  • 안내 : 군산시 문화예술과 / 군산문화원 (451-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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